한국학교연합신문 뉴스추천뉴스2026. 5. 12. 오후 5:29:16

풍요의 기준은 무엇인가

박시우 작가
풍요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때 자전거는 단순한 탈것이 아니었다. 1970년대만 해도 자전거 한 대는 집안의 귀한 재산이었고, 그것을 장만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활이 한 단계 나아졌다고 여겨질 만큼 값진 물건이었다. 

어디 자전거뿐이겠는가. 모든 것이 넉넉지 않던 시절에는 연장 하나, 그릇 하나, 가구 하나도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쓸만한 물건은 생활용품이면서 동시에 재산 목록에 올릴 만한 소중한 자산이었다. 물건에는 늘 기다림과 수고가 따라붙었고, 그만큼 아끼고 오래 쓰는 태도도 자연스레 몸에 배어 있었다.

그런 세월이 흘러 지금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에서 살아간다. 거리에는 자동차가 넘치고, 집마다 가전제품이 가득하며, 필요한 물건은 클릭 몇 번으로 집 앞까지 도착하는 시대가 되었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는 분명 풍요의 시대에 들어와 있다. 

그런데 이 풍요의 한복판에서 문득 생각해볼 장면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아이들이 놀다 간 놀이터 한쪽에 방치된 자전거가 있고, 아직 멀쩡한 장난감도 버려져 있다. 분리수거장에 가보면 쓰임새가 충분한 물건들이 쉽게 버려진다. 풍요가 커질수록 물건의 생명은 짧아지고, 소유의 양이 늘어날수록 아끼는 마음은 그만큼 줄어드는 듯하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풍요인가. 물건이 많아졌다는 사실만으로 사람의 삶이 정말 더 넉넉해졌다고 할 수 있는가. 쉽게 사고 쉽게 버릴 수 있는 능력이 곧 잘산다는 뜻인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분명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러나 그 풍요를 다루는 태도는 오히려 더 가벼워지고, 감사와 절제의 감각은 더 옅어지고 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진 시대에 사람들은 여전히 “경기가 안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물론 실제 경제 상황의 어려움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말속에 다른 차원의 결핍감도 함께 섞여 있다. 지금 가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라기보다, 내가 기대하는 욕심의 크기에 비해 만족스럽지 않다는 말이다. 즉 풍요의 기준이 점점 바깥으로만, 더 큰 소비와 더 높은 수준의 소유로만 밀려가고 있다. 그래서 실제로는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늘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풍요의 문제는 물질의 양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뿌리는 마음에 있다. 무엇을 풍요라고 부를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흔들릴 때,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만족하기 어렵다. 

반대로 올바른 기준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은 가운데서도 감사와 절제를 통해 삶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잘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경제와 물질의 확대를 삶의 목표로 삼아 달려왔다. 문제는 정작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법은 익혔지만, 더 깊이 누리고 더 바르게 사용하는 법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 온 셈이다.

물론, 경제적 성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가난을 줄이고 생활을 안정시키며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 낸 발전은 분명 귀한 성취다. 그러나 성장의 방향이 오직 물질의 확대에만 머물 때, 풍요는 쉽게 과잉과 낭비로 변질된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물건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되고, 삶의 가치도 소비할 수 있는 것들로만 판단하게 된다. 

잘산다는 말은 남보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것을 바르게 이해하고 알맞게 사용하며 감사할 줄 아는 삶으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진정한 풍요는 소유의 크기보다 태도의 깊이에서 결정된다. 가진 것을 아끼고, 필요한 것과 욕심을 구분하며, 버리는 일 앞에서도 책임을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많지 않아도 풍요롭게 살아간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늘 부족하다고 느끼고, 더 많이 가져야만 안심되는 사람은 사실상 결핍 속에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풍요는 통장에 적힌 숫자만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감각과 기준의 문제다.

지금 우리 사회에 더 절실한 것은 풍요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다. 아이들에게 잘사는 법을 가르친다면서 좋은 직업과 높은 소득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물건을 대하는 태도, 자연을 대하는 태도, 소비와 절제의 의미, 감사와 책임의 윤리를 함께 가르쳐야 한다. 교육은 사람을 성공하게 만드는 기술만이 아니라, 풍요를 바르게 누릴 줄 아는 존재로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저널리즘 역시 이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언론은 단지 소비를 자극하고 성과를 중계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풍요라고 부르고 있는지, 그 기준이 어디에서 흔들리고 있는지, 더 본질적인 삶의 방향은 무엇인지를 사회에 묻고 비추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다시 본질의 기준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실천할 필요가 있다. 풍요란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제 가치를 제대로 발현하는 상태에 더 가깝다. 산은 산대로, 강은 강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자기 존재의 가치를 완전히 드러낼 때 비로소 세상은 풍요로워진다. 

물건은 물건답게 쓰이고, 자연은 자연답게 보존되며, 사람은 사람답게 감사하고 책임질 줄 알 때 풍요는 비로소 양이 아니라 질이 된다. 그러므로 풍요의 기준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많이 가진 삶이 아니라, 바르게 누리는 삶이다. 

더 크게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정직하게 사용하는 삶이다. 그리고 바로 그 기준 위에서 올곧게 설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잘 사는 길로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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